월터 베델 스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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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월터 베델 스미스는 1895년 인디애나폴리스에서 태어나,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미국의 군인이자 외교관, 그리고 정보기관의 수장이다. 그는 육군 참모장으로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를 보좌하며 연합군의 승리에 기여했고, 이후 주소련 대사, 중앙정보국(CIA) 국장, 국무부 차관을 역임했다. 1961년 사망했으며,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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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터 베델 스미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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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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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명 | 비틀 |
출생일 | 1895년 10월 5일 |
출생지 | 미국 인디애나주 인디애나폴리스 |
사망일 | 1961년 8월 9일 |
사망지 | 미국 워싱턴 D.C. |
배우자 | 노리 클라인 (1917–1961) |
군 경력 | |
충성 | 미국 |
군 종류 | 미국 육군 |
복무 기간 | 1911–1953 |
군번 | 0-10197 |
계급 | [[파일:US-O10 insignia.svg|25px]] 대장 |
부대 | [[파일:USA - Army Infantry Insignia.png|25px]] 보병 병과 |
지휘 | 제1군 |
참전 전투 | 제1차 세계 대전 에스네-마른 공세 제2차 세계 대전 북아프리카 전역 횃불 작전 튀니지 전역 이탈리아 전역 허스키 작전 연합군의 이탈리아 침공 노르망디 상륙 작전 지크프리트 라인 전역 벌지 전투 서부 연합군의 독일 침공 |
수훈 | 육군 공로 훈장 (3회) 해군 공로 훈장 공로 훈장 청동성훈장 국가 안보 훈장 |
공직 | |
직책 1 | 미국 국무부 차관 |
대수 1 | 18대 |
대통령 1 |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
임기 시작 1 | 1953년 2월 9일 |
임기 종료 1 | 1954년 10월 1일 |
전임자 1 | 데이비드 K. E. 브루스 |
후임자 1 | 허버트 후버 주니어 |
직책 2 | 중앙정보국 국장 |
대수 2 | 4대 |
대통령 2 | 해리 트루먼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
부관 2 | 윌리엄 H. 잭슨 앨런 덜레스 |
임기 시작 2 | 1950년 10월 7일 |
임기 종료 2 | 1953년 2월 9일 |
전임자 2 | 로스코 H. 힐렌쾨터 |
후임자 2 | 앨런 덜레스 |
직책 3 | 소련 주재 미국 대사 |
대통령 3 | 해리 트루먼 |
임기 시작 3 | 1946년 4월 3일 |
임기 종료 3 | 1948년 12월 25일 |
전임자 3 | W. 애버렐 해리먼 |
후임자 3 | 앨런 G. 커크 |
2. 초기 생애 및 군 경력
월터 베델 스미스는 1895년 10월 5일 인디애나 주 인디애나폴리스에서 태어났다.[1] 아버지 윌리엄 롱 스미스는 페티스 드라이 구즈 컴퍼니의 실크 바이어였고, 어머니 아이다 프랜시스 베델은 같은 회사에서 일했다.[5] 스미스는 두 아들 중 장남이었다.
어릴 때부터 "베델"이라고 불린 스미스는 "비틀", "비들", 또는 "부들"이라는 별명을 얻었다.[2] 세인트 피터 앤 폴 학교, 공립학교 #10 및 #29, 올리버 페리 모튼 학교에서 교육받았고,[3] 에머리치 매뉴얼 고등학교에서 기계공이 되기 위해 공부했다.[4] 내셔널 모터 비히클 컴퍼니에서 일자리를 얻은 후 졸업하지 않고 고등학교를 자퇴했으며,[4] 버틀러 대학교에 입학했지만, 아버지의 건강 문제로 학교를 그만두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직장으로 돌아갔다.[5]
1913년 스미스는 메리 엘리너 (노리) 클라인을 만났고, 1917년 7월 1일에 로마 가톨릭 결혼식을 올렸다. 이들의 결혼은 오래 지속되었지만 자녀는 없었다.[7]
2. 1. 초기 군 복무
1911년, 16세의 스미스는 인디애나 주 방위군 제2 인디애나 보병 연대 D 중대에 사병으로 입대했다.[6] 1913년 오하이오 강 홍수와 인디애나폴리스 노면 전차 파업으로 두 번 소집되었다.[6] 스미스는 병장으로 진급한 후 상사로 진급했다. 판초 비야 원정 동안 그는 인디애나 주 방위군 참모로 복무했다.[6]2. 2.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스미스는 1913년 오하이오 강 홍수 당시의 활동으로 인해 1917년 장교 훈련 후보로 지명되었고, 장교 교육을 위해 인디애나 주 포트 벤자민 해리슨에 있는 장교 후보생 훈련소로 보내졌다.[8] 1917년 11월 27일 졸업 후 직접 임관하여 소위로 임명되었다. 이후 노스캐롤라이나 주 캠프 그린에 주둔한 제4보병사단 소속 제39보병연대 제1대대 신설 부대인 A 중대에 배속되었다.[8] 제1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던 1918년 5월 9일, 제4보병사단은 유럽으로 향하기 위해 뉴저지 주 호보컨을 출발하여 5월 23일 프랑스 브레스트에 도착했다. 영국 및 프랑스 군대와 함께 훈련을 받은 제4사단은 1918년 6월 최전선에 투입되어 1918년 7월 18일 마른-아슨 공세에 참전했다. 스미스는 이틀 후 공격 중에 포탄 파편에 부상을 입었다.[9]2. 3. 전간기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스미스는 미국 전쟁부 참모부에서 정보 장교로 근무했다. 그는 예산관리국과 필리핀 주둔 미군 부대 등에서 복무하며 경력을 쌓았다. 1930년대에는 조지아 주 포트 베닝의 보병학교와 캔자스 주 포트 리븐워스의 지휘참모대학교, 그리고 육군 전쟁대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3. 제2차 세계 대전
조지 C. 마셜이 육군 참모총장으로 취임하면서 시작된 스미스의 경력은 제2차 세계 대전 발발과 함께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스미스는 뛰어난 사무 능력으로 연합군 최고 사령부 내 조정과 잡무를 신속하게 처리하여, 총사령관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가 전선 부대 시찰과 장병 격려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왔다.
하지만, 스미스는 조지 S. 패튼 장군의 해임과 같은 부정적인 소식을 주로 발표하여 냉혹한 고위 관리자라는 평판을 얻었으며, 아이젠하워의 "해처리"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30] 또한, 전쟁 중 아프리카계 미국인 병사의 능력에 의문을 제기하는 발언을 하여 인종 차별 논란을 일으켰다.[3]
3. 1. 참모 장교로의 활약
조지 C. 마셜 장군이 1939년 9월 육군 참모총장이 되자, 스미스를 워싱턴 D.C.로 데려와 참모총장 비서의 보좌관으로 임명했다.[19] 참모총장 비서는 주로 기록, 서류 작업, 통계 수집을 담당했지만, 분석, 연락 및 행정 업무도 상당량 수행했다.[20] 스미스의 임무 중 하나는 소장 에드윈 "파" 왓슨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의 선임 군사 보좌관과의 연락이었다.[19] 스미스는 1941년 5월 4일에 중령으로, 1941년 8월 30일에 대령으로 진급했다.[21] 1941년 9월 1일, 참모총장 비서인 올랜도 워드 대령이 제1 기갑 사단의 지휘를 맡게 되었고, 스미스는 참모총장 비서가 되었다.[22]1941년 12월과 1942년 1월에 워싱턴 D.C.에서 열린 아카디아 회담은 영국 참모총장 위원회의 상대 기구로서 합동참모본부의 창설을 의무화했으며, 스미스는 1942년 1월 23일자로 그 비서로 임명되었다. 같은 회담에서 (미국) 합동참모본부와 (영국) 참모총장 위원회가 단일 기구로 회의를 개최하는 연합 참모본부의 창설도 이루어졌다. 영국 합동 참모 임무의 비비안 다이크스 준장이 처음에는 새로운 기구의 서기 업무를 제공했지만, 마셜은 미국 서기실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23]
그는 스미스를 연합 참모본부 및 합동참모본부의 비서로 임명했다. 다이크스가 스미스보다 근무 연한이 더 길었고, 마셜은 스미스가 책임을 맡기를 원했기 때문에, 스미스는 1942년 2월 2일에 준장으로 진급했다. 그는 일주일 후 새로운 직책을 맡았고, 다이크스는 그의 부관이 되었다. 두 사람은 협력하여 서기실을 만들고 조직했으며, 연합 참모본부 조직을 캐나다, 호주, 프랑스 등과 함께 양국 동맹국의 전쟁 노력을 조정할 수 있는 기구로 구축했다.[23]
스미스의 임무는 최고 수준에서 전략 토론에 참여하는 것을 포함했으며, 그는 종종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전략 문제를 브리핑했다.[23] 그러나 스미스는 다른 장교들이 자신이 원하는 작전 지휘를 받는 것을 보면서 좌절감을 느꼈다.[24] 그는 나중에 "조지 마셜의 참모총장 비서로 일했던 그 해는 내 경력 전체에서 가장 보람 있었지만, 동시에 내 인생에서 가장 불행한 해였다."라고 회고했다.[25]

1942년 6월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소장이 유럽 전구 사령관으로 임명되자, 그는 스미스에게 워싱턴에서 참모장으로 파견해 달라고 요청했다. 스미스의 참모 장교로서의 경력과 영국군과 조화롭게 협력할 수 있는 그의 입증된 능력은 그를 이 자리에 적합한 인물로 만들었다. 마셜은 마지못해 이 요청을 받아들였고,[26] 스미스는 1942년 9월 15일 연합군 사령부(AFHQ)의 참모장으로 취임했다. 그의 보고를 받는 사람은 두 명의 부참모장, 알프레드 그루엔터 준장과 존 화이트리(영국 육군 장교) 준장, 그리고 험프리 게일 소장이었다.[27]
AFHQ는 각 부서의 장이 다른 국적의 부관과 짝을 이루는 균형 잡힌 다국적 조직이었다. 그 구조는 일반적으로 미국식이었지만 일부 영국식 측면이 있었다. 예를 들어, 게일은 CAO로서 인력 및 물품 기능을 모두 통제했는데, 미국식 시스템에서는 스미스에게 직접 보고했을 것이다.[27] 처음에 AFHQ는 런던에 위치했지만, 1942년 11월과 12월에 알제로 이전했으며, 스미스는 12월 11일에 도착했다.[28] AFHQ는 정원이 700명에 불과했지만, 스미스는 공격적으로 이를 확장했다. 1943년 1월까지 미국의 인원만 1,406명이었고, 결국 인원은 4,000명이 넘었다.[29] 스미스는 참모장으로서 아이젠하워에 대한 접근을 열성적으로 관리했고, 까다롭고 무뚝뚝한 관리자라는 평판을 얻었으며, 종종 아이젠하워의 "해처리"라고 불렸다.[30]
북아프리카 전구 미 육군(NATOUSA)의 조직이 진행되는 동안, 스미스는 1943년 2월 15일까지[31] 참모장 역할을 겸임했으며, 그 후 에버렛 S. 휴즈 준장이 부전구 사령관 겸 통신대(Communications Zone) 사령관이 되었다.[32] 스미스와 아이젠하워의 오랜 친구인 휴즈 사이의 관계는 긴장되었다. 스미스는 나중에 휴즈를 "제국 건설"로 비난했고, 두 사람은 사소한 문제로 충돌했다.[33] 알제에서 스미스와 아이젠하워는 거의 함께 사교하지 않았다. 스미스는 정원과 테라스로 둘러싸인 그의 별장에서 공식 만찬을 열었고, 두 개의 큰 응접실은 모자이크, 오리엔탈 카펫 및 예술 보물로 장식했다. 아이젠하워처럼 스미스에게도 간호사이자 여성 동반자인 에델 웨스터만 대위가 있었다.[34]
카세린 협곡 전투의 참담한 패배 이후, 아이젠하워는 스미스를 미국 II 군단의 상황을 보고하도록 보냈다. 스미스는 로이드 프레덴달 소장과 해롤드 알렉산더 장군, 오마 브래들리 소장, 루시안 트러스콧 소장과 마찬가지로 그의 지휘관 해임을 권고했다. 그들의 조언에 따라 아이젠하워는 프레덴달을 조지 S. 패튼 소장으로 교체했다. 아이젠하워는 또한 AFHQ의 잘못된 정보가 카세린에서의 패배의 요인으로 지적하면서, 참모 정보 부관(G-2)인 에릭 목클러-페리먼 준장을 해임했다. 목클러-페리먼은 케네스 스트롱 준장으로 교체되었다.[35]
카세린 협곡에서의 참패는 연합군 간의 관계를 악화시켰고, 또 다른 위기가 발생했는데, II 군단이 연합군의 공중 엄호 부족으로 인해 적의 항공기가 해당 구역에서 자유롭게 작전했다고 보고했기 때문이다. 이는 영국 공군 원수 아서 코닝햄이 미국 군대의 능력에 대해 가혹하게 비판하는 반응을 이끌어냈다.[36] 아이젠하워는 마셜에게 코닝햄이 수석 연합군 지휘관들 사이의 적대감을 통제할 수 없기 때문에 그의 지휘에서 해임되어야 한다고 제안하는 서신을 초안했지만, 스미스는 그에게 보내지 않도록 설득했다.[37] 대신, 아서 테더 공군 원수, 칼 스파아츠 소장, 로렌스 S. 쿠터 준장이 패튼의 사령부를 방문했다. 그들의 회의는 독일 공습으로 인해 방해받았고, 이는 패튼의 말이 맞다는 것을 항공병들에게 확신시켰다. 코닝햄은 자신의 서면 비판을 철회하고 사과했다.[36]

시칠리아 상륙 작전을 위해 연합 참모총장은 아이젠하워를 전체 사령관으로 임명했지만, 세 구성 사령관인 알렉산더, 테더, 앤드루 커닝햄 경 제독에게 "협력"하라고 명령했다. 아이젠하워에게 이 지휘 체제는 구식 영국 "위원회 시스템"으로의 회귀를 의미했다. 그는 통일된 지휘 구조를 요구하는 연합 참모총장에게 전보를 초안했지만, 스미스는 그에게 찢어 버리도록 설득했다.[38]
연합군 지휘관들 간에는 작전 계획에 대한 이견이 발생했는데, 이 계획은 항구와 비행장의 조기 점령에 대한 공군, 해군 및 물류 계획자들의 바람에 따라 일련의 분산된 상륙을 요구했다. 버나드 몽고메리 장군, 영국 제8군 사령관은 이 계획의 측면에 반대했는데, 이는 연합군이 각개 격파될 위험에 노출되었기 때문이다. 몽고메리는 미국군과 영국군이 나란히 상륙하는 대체 계획을 제시했다. 그는 스미스에게 자신의 대체 계획이 타당하다고 설득했고, 두 사람은 다른 대부분의 연합군 지휘관을 설득했다. 몽고메리의 계획은 테더와 커닝햄을 만족시키는 비행장의 조기 점령을 제공했다. 토머스 B. 라킨 소장과 같은 물류 담당자들은 항구가 없이는 보급이 실용적이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를 수륙양용 트럭의 사용으로 해결했다.[39]
1943년 8월, 스미스와 스트롱은 지브롤터를 경유하여 리스본으로 민간 옷을 입고 비행하여 영국 대사관에서 ''준장'' 주세페 카스텔라노를 만났다. 카스텔라노는 이탈리아가 나치 독일에 대항하여 연합국에 가입할 조건을 마련하기를 희망했고, 스미스는 이탈리아와 연합군 간의 휴전을 작성할 권한을 받았지만 정치적 문제는 협상할 수 없었다.[40] 1943년 9월 3일, 스미스와 카스텔라노는 각각 아이젠하워와 피에트로 바돌리오를 대표하여 시칠리아 카시빌레에서 올리브 나무 아래에서 간단한 의식을 치르고 합의된 내용을 서명했다.[41] 10월, 스미스는 10월 10일에 뉴욕 하이드 파크에서 루즈벨트와의 회의를 포함하여 일련의 회의에 아이젠하워를 대표하기 위해 2주 동안 워싱턴을 방문했다.[42]
1943년 12월, 아이젠하워는 노르망디 상륙 작전인 오버로드 작전의 연합군 최고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43] 아이젠하워는 스미스와 다른 AFHQ의 핵심 참모들을 새로운 임무에 데려가고 싶어했지만,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은 지중해 지역의 부 최고 사령관으로 스미스를 AFHQ에 남겨두기를 원했다. 처칠은 아이젠하워의 강력한 요청에 마지못해 동의했다.[30] 새해 전날, 스미스는 장군 (하루 뒤 원수)인 앨런 브루크와 만나 AFHQ에서 연합군 원정군 최고 사령부(SHAEF)로 핵심 영국 참모들을 이전하는 문제를 논의했다. 브루크는 스미스의 강력한 요청 후에야 게일을 풀어줬지만 스트롱의 이전을 거부했다.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고, 브루크는 나중에 스미스의 행동에 대해 아이젠하워에게 불평했다. 이는 고위 영국 장교가 스미스에 대해 공개적으로 불만을 제기한 유일한 사례였다.[45] 화이트리는 스트롱 대신 SHAEF의 정보 참모(G-2)가 되었지만, 아이젠하워와 스미스는 결국 뜻대로 되었고, 스트롱은 1944년 5월 25일 준장 토머스 J. 베츠를 부관으로 임명받아 직책을 맡았다.[46]

스미스는 1944년 1월 중장으로 진급했고 대영 제국 훈장의 기사단장이 되었다.[47] 1944년 1월 18일, 그는 2.5톤의 개인 수하물을 두 대의 보잉 B-17 플라잉 포트리스에 싣고 런던으로 출발했다.[48] 최고 연합군 사령관 참모(COSSAC)의 참모들은 이미 활동 중이었고, 1943년 4월부터 오버로드 작전을 계획하고 있었다.
이 참모들은 SHAEF에 흡수되었고, COSSAC의 프레데릭 모건 소장이 SHAEF의 스미스 부 참모장이 되었다. 게일은 부 참모장직과 최고 행정 책임자를 겸임했고, 부 참모장(공군)으로는 공군 중장 제임스 롭이 있었다.[49] 다른 참모 부서의 책임자들은 레이 W. 바커 소장 (G-1), 해럴드 R. 불 소장 (G-3), 로버트 W. 크로퍼드 소장 (G-4), 로저 럼리 경 소장 (G-5)이었다.[50]
모건은 그의 COSSAC 본부를 런던 세인트 제임스 광장 31번지에 있는 노퍽 하우스에 두었지만, 스미스는 아이젠하워가 주요 도시에 본부를 두지 않겠다는 뜻에 따라 런던 외곽의 부시 파크로 옮겼다. 막사 캠프가 건설되었다. 오버로드 작전이 시작될 무렵, 750명의 장교와 6,000명의 사병들을 위한 숙소가 마련되었다.[53]
아이젠하워와 스미스의 사무실은 지하 단지에 있었다. 스미스의 사무실은 소박했고, 마셜의 큰 초상화가 눈에 띄었다.[52] 몽고메리의 제21군 집단과 제독 버트럼 램지 경의 연합 해군 원정군 본부가 위치한 포츠머스 근처에 샤프너라는 암호명의 진격 지휘소가 설치되었다.[53]
노르망디에서의 지상 작전은 처음에는 몽고메리가 통제했지만, SHAEF 전방 본부는 8월에 줄루빌로 이동했고, 1944년 9월 1일 아이젠하워는 브래들리의 제12군 집단과 몽고메리의 제21군 집단에 대한 통제권을 갖게 되었다.[54] 스미스는 곧 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전방 본부는 너무 멀리 떨어져 접근이 어려웠고 필요한 통신 장비가 부족했다.[55]
1944년 9월 6일, 아이젠하워는 SHAEF 전방 본부와 SHAEF 본부 모두 가능한 한 빨리 베르사유로 이동하라고 명령했다. SHAEF 전방 본부는 9월 15일에 이동을 시작하여 9월 20일에 베르사유에서 개소했다. SHAEF 본부는 부시 파크에서 항공편으로 이동했다. 이동은 10월까지 완료되었고 SHAEF는 1945년 2월 17일까지 그곳에 머물렀으며, 이때 SHAEF 전방 본부가 랭스로 이동했다.[56] 이때까지 SHAEF는 규모가 16,000명의 장교와 사병으로 증가했고, 이 중 10,000명은 미국인, 6,000명은 영국인이었다.[57]

1944년 11월까지, 스트롱은 독일군의 아르덴 또는 보주에서의 반격 가능성을 보고했다. 스미스는 스트롱을 브래들리에게 직접 보내 경고하도록 했고, 브래들리는 자체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58] 독일군의 아르덴 대공세의 규모와 맹렬함은 충격적이었고, 스미스는 경고를 울리지 못한 것에 대해 비판을 받는 스트롱을 변호해야 했다. 그는 브래들리에게 충분한 경고가 주어졌다고 생각했다.[59]
전투가 시작되자 아이젠하워는 브래들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제12군 집단의 예비 부대에 있는 두 개의 기갑 사단을 투입하고, 자신의 빈약한 예비 부대인 두 개의 공수 사단을 투입하는 결단력 있는 조치를 취했다. 화이트리와 베츠는 미 제1군 사령부를 방문했고, 지휘관들이 상황을 처리하는 방식에 감명을 받지 못했다. 스트롱, 화이트리, 베츠는 아르덴 북쪽의 군대에 대한 지휘권을 브래들리에서 몽고메리로 이전할 것을 권고했다.[60]
스미스의 즉각적인 반응은 이 제안을 즉시 기각하는 것이었다. 그는 스트롱과 화이트리에게 해고되었으니 짐을 싸서 영국으로 돌아가라고 말했다. 다음 날 아침, 스미스는 사과했고, 생각을 바꾸어 아이젠하워에게 자신의 권고안으로 제시하겠다고 알렸다. 그는 군사적, 정치적 함의를 깨닫고 그러한 권고는 미국 장교로부터 나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1944년 12월 20일, 그는 아이젠하워에게 권고했고, 아이젠하워는 브래들리와 몽고메리에게 전화했고, 아이젠하워는 명령했다.[60]
이 결정은 많은 미국인, 특히 제12군 집단의 많은 사람들에게 매우 분개했는데, 그들은 이 조치가 미국 육군의 지휘 체계를 불신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했다.[61] 오버로드 작전이 시작된 이후의 막대한 사상자는 아르덴 대공세로 인한 위기 상황이 발생하기 전에도 보병 대체 병력의 심각한 부족을 초래했다. 통신 구역 부대에서 병력을 전환하기 위한 조치가 취해졌다. 통신 구역의 사령관인 존 C. H. 리 중장은 아이젠하워를 설득하여 군인들이 "색깔이나 인종에 관계없이 가장 도움이 필요한 부대에 자원하여 승리를 가져오기 위해 어깨를 나란히 싸울 기회를 제공"하도록 허용했다.[62]
스미스는 즉시 정치적 함의를 파악하고 자신의 입장을 아이젠하워에게 서면으로 전달했다.

정책이 수정되어 유색 인종 병사들이 임시 소대에서 복무했다. 제12군 집단에서는 이들이 연대에 배속되었고, 제6군 집단에서는 소대가 사단에 배속된 전체 중대로 묶였다. 전자의 배열은 일반적으로 배속된 부대에서 더 좋은 평가를 받았는데, 유색 인종 소대는 중대 수준의 부대 훈련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64]
파리 해방 동안, 연합군 최고 사령부는 행진을 이끄는 자유 프랑스군이 모두 백인이어야 한다고 압력을 가했고, 이는 대부분의 부대가 3분의 2 이상이 아프리카계였기 때문에 어려웠다.[65] 스미스는 기밀 메모를 작성하여 미국 분리 소대와 일치시키기 위해 "언급된 사단이 백인 요원으로 구성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명시했다.[66]
1945년 4월 15일, 네덜란드의 나치 총독(Reichskommissar)인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는 민간인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암스테르담을 식량 및 석탄 수송에 개방하겠다고 제안했다. 스미스와 스트롱은 SHAEF를 대표했고, 이반 수슬로파로프 소장은 소련을 대표했고, 리페-비스터펠트의 베른하르트 공자는 네덜란드 정부를 대표했고, 프랜시스 드 깅강 경 소장은 제21군 집단을 대표하여 1945년 4월 30일 네덜란드 마을 아흐터펠트에서 자이스-잉크바르트와 만났다. 자이스-잉크바르트를 전쟁 범죄로 기소하겠다고 위협한 후, 스미스는 이 나라 서부 도시에서 고통받는 네덜란드 민간인에게 식량을 제공하고, 제1 캐나다군에 대한 네덜란드의 평화적이고 완전한 독일 항복에 대한 논의를 성공적으로 협상하여 5월 5일에 항복했다.[67]
스미스는 1945년 5월에 독일군, 즉 독일 국방군(Oberkommando der Wehrmacht)의 항복 협상을 다시 진행해야 했다. 스미스는 독일 최고 사령부의 대표, 알프레트 요들 대장과 한스-게오르크 폰 프리데부르크 대장을 만났다. 스트롱은 다시 통역을 맡았다. 스미스는 조건을 수락하지 않으면 연합군이 전선을 봉쇄하여 남아있는 독일군을 적군의 손에 넘기겠다고 위협하는 강경한 입장을 취했지만, 항복이 발효되기 전에 휴전에 대한 일부 양보를 했다. 1945년 5월 7일, 스미스는 연합군을 대표하는 소련 장군 수슬로파로프와 함께 항복 문서에 공동 서명했고, 독일을 대표하는 요들도 서명했다. 프랑스 대표인 프랑수아 세브즈 소장은 증인으로 서명했다.[68][69]
3. 2. 인종 차별 논란
스미스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아프리카계 미국인 병사의 능력에 의문을 제기하는 발언을 하여 논란이 되었다.[3] 파리 해방 당시 자유 프랑스군 행진에 백인 병사들만 참여하도록 압력을 가했다는 비판도 받았다.[3]4. 전후 활동
1949년 미국으로 귀국한 스미스는 미국 육군 대장으로 제1군을 지휘했다.[73]
스미스는 조지 S. 패튼 장군의 해임 등 좋지 않은 소식을 발표하는 역할을 맡아 냉정한 고위 관리라는 평판을 얻었으며, 종종 아이젠하워의 암살자라는 조롱을 받기도 했다. 또한, 스미스는 인종 차별 옹호자로 알려져 전쟁 당시 아프리카계 미국인 병사의 유효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저술이나 대화를 해 자주 주의를 받았다.
한편, 사무 업무에 뛰어났던 스미스는 연합군 최고 사령부 내 조정과 잡무를 신속하게 처리하여, 총사령관 아이젠하워를 번거로운 사령부 업무에서 해방시켰다. 아이젠하워는 남는 시간을 활용하여 적극적으로 전선 부대를 시찰하고, 장병들과 교류하며 격려했다. 그 결과, 미군 장병 사이에서 아이젠하워의 인기가 높아졌고, 전후 아이젠하워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을 때, 아이젠하워를 '아이크'라고 부르며 존경하는 퇴역 장병들이 큰 지지 기반이 되었다. 이 때문에 스미스는 "아이젠하워를 아이크로 만든 남자"라고 불렸다.
이후 스미스는 1950년 중앙정보국(CIA) 국장이 되었고, 1953년부터 1954년까지 미국 국무 차관을 역임했으며, 미국 국가 안보국 조직 구축에 기여했다.
4. 1. 주소련 미국 대사
1946년 3월, 스미스는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의 지명으로 주소련 대사가 되기 위해 미국 육군에서 퇴역했다.[70] 그는 1946년 4월 모스크바에 부임하여 1948년 12월까지 대사직을 수행했다.[71]스미스의 대사 재임 기간은 미국과 소련의 관계가 냉전으로 급격히 악화되는 시기였다. 1947년경부터 스미스는 모스크바와 공통점을 찾으려던 이전의 유화적 입장 대신, 소련의 팽창주의를 억제하는 봉쇄 정책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소련의 팽창주의를 묵인하지 않고서는 어떠한 이해도 불가능하며, 소련의 완강함과 지연 전술이 유럽의 재건과 경제 회복을 방해한다고 확신했다. 스미스는 소련을 비밀스럽고, 전체주의적이며, 적대적인 국가로 간주했다.[71]
스미스는 대사 재임 기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저술한 ''모스크바에서의 3년'' (1950)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 ...우리는 자유로운 삶의 방식을 위한 지속적인 투쟁을 강요받고 있으며, 이는 수년 동안 지속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잘못된 안도감도 허용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소련의 전술이 우리를 지치게 하고, 화나게 하며, 약점을 계속 탐색하는 것이 될 것이라고 예상해야 하며, 이전에 요구한 적이 없는 수준의 확고함과 인내심을 길러야 합니다.[72]
스미스는 1949년 3월 미국으로 귀국했다.[73]
4. 2. 중앙정보국(CIA) 국장
스미스는 1950년 10월 7일 중앙정보국(CIA) 국장으로 임명되었다.[76] 1949년 정보 조사 그룹은 CIA가 정보 조정 및 생산 모두에서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덜레스-잭슨-코레아 보고서를 작성했고, 미국 국가안전보장회의는 보고서의 결론과 권고를 수용했다.[77] 1950년 5월, 트루먼 대통령은 스미스가 CIA에 필요한 인물이라고 결정했다.[78]CIA에 대해 잘 알지 못했던 스미스는 많은 것을 아는 부국장을 요청했고, 시드니 소어스는 윌리엄 하딩 잭슨을 추천했다. 잭슨은 "잔소리는 하지 않는 것"을 포함한 세 가지 조건을 걸고 부국장 직을 수락했다.[80]
스미스와 잭슨은 덜레스-잭슨-코레아 보고서의 권고에 따라 기관을 재편성하고 정보를 수집, 배포하는 절차를 간소화했다.[81] 그러나 한국 전쟁 발발 4개월 후에도 CIA는 한국 상황에 대한 조정된 추정치를 내놓지 못했다. 이에 스미스는 윌리엄 L. 랭어를 책임자로 하는 새로운 국가추정국(ONE)을 만들어 정보 분석의 전문성을 높였다.[79] 랭어의 직원들은 이후 20년 동안 준수된 절차를 만들었으며, 스미스는 경제, 심리 및 사진 정보를 얻기 위한 노력을 강화했다.[79]
스미스는 정책조정국(OPC)과 특별작전국(OSO)을 통합하여 CIA의 은밀한 작전 수행 능력을 강화했다.[79] 1951년 1월 초, 앨런 덜레스를 계획 담당 부국장(DDP)으로 임명하여 OPC와 OSO를 모두 감독하게 했고, 1952년 8월까지 이들을 하나의 국으로 통합했다.[79]
스미스는 은밀한 작전에 대한 책임을 통합함으로써 CIA를 주로 그 일을 담당하는 정부 부서로 만들었으며,[83] CIA가 직업 서비스가 되기를 원했다.[84] 그는 훈련을 훈련 담당 국장 아래 통합하고 직업 서비스 프로그램을 개발했다.[85]
4. 3. 국무부 차관
1953년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 당선인은 스미스를 국무부 차관으로 임명한다고 발표했다. 스미스의 임명은 미국 상원에서 확정되었고, 그는 중앙정보국장(DCI)에서 사임했다.[87] 1954년 5월, 스미스는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의 패배를 막기 위한 개입에 영국이 참여하도록 설득하기 위해 유럽을 방문했다. 그것이 실패하자 그는 소련 외무부의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외무 장관과 합의하여 베트남을 두 개의 별도 지역으로 분할했다.[88]1953년, 과테말라 하코보 아르벤스 구스만 대통령이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 소유의 토지를 국유화하겠다고 위협하자, 스미스는 과테말라 주재 미국 대사에게 중앙정보국(CIA)이 계획한 1954년 과테말라 쿠데타를 실행하라고 명령했고, 이는 이듬해에 완료되었다. 스미스는 1954년 10월 1일 국무부를 떠나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에 합류했다.[88]
5. 사망 및 유산
스미스는 1961년 8월 9일 워싱턴 D.C. 자택에서 심장마비를 겪었고, 월터 리드 육군 병원으로 이송되는 구급차 안에서 사망했다. 그는 특별 완전 영예 장례를 받을 자격이 있었지만, 미망인은 1959년 마셜에게 거행된 장례식을 본뜬 간소한 합동 군 장례를 치러줄 것을 요청했다. 그녀는 남편의 묘지로 알링턴 국립묘지 7구역, 마셜의 묘지 근처를 선택했다.[90] 그녀는 1963년 사망 후 그의 옆에 묻혔다.[91] 스미스의 서류는 캔자스주 애빌린의 아이젠하워 대통령 센터(Eisenhower Presidential Center)에 보관되어 있다.[92]
6. 계급
7. 훈장 및 표창
미국 군사 훈장 | |
육군 공로 훈장 (Army Distinguished Service Medal) 2개의 참나무 잎 훈장 | |
해군 공로 훈장 (Navy Distinguished Service Medal) | |
공로 훈장 (Legion of Merit) | |
청동 성장 훈장 (Bronze Star Medal) | |
미국 민간 훈장 | |
국가안보 훈장 (National Security Medal) | |
미국 군 복무 훈장 | |
제1차 세계 대전 승전 훈장 (World War I Victory Medal) 3개의 전투 죔쇠 | |
미국 방어 복무 훈장 (American Defense Service Medal) | |
유럽-아프리카-중동 전역 훈장 (European-African-Middle Eastern Campaign Medal) 7개의 참전 별장 | |
제2차 세계 대전 승전 훈장 (World War II Victory Medal) | |
점령군 훈장 (Army of Occupation Medal) "독일" 죔쇠 | |
국가 방위 복무 훈장 (National Defense Service Medal) | |
국제 및 외국 훈장 | |
왕관 훈장 대십자장 (벨기에) | |
전쟁 십자 훈장 (벨기에) | |
군사 공로 훈장 대십자장 (브라질) | |
육군 군사 공로 훈장 1등급 대십자장 (칠레) | |
백사자 훈장 2등급 (체코슬로바키아) | |
전쟁 십자 훈장 1939–1945 (체코슬로바키아) | |
레지옹 도뇌르 훈장 그랜드 오피서 (프랑스) | |
![]() | 1914–1918 전쟁 십자 훈장 (프랑스) |
1939–1945 전쟁 십자 훈장 (프랑스) | |
쿠투조프 훈장 1등급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 |
바스 훈장 기사단장 (영국) | |
대영 제국 훈장 기사단장 (영국) | |
오크 왕관 훈장 대십자장 (룩셈부르크) | |
우이삼 알 아위트 훈장 대십자장 (모로코) | |
네덜란드 사자 훈장 기사 대십자장 (네덜란드) | |
무공 훈장 은십자장 (폴란드) | |
폴로니아 레스티투타 훈장 2등급 (폴란드) | |
그룬발트 십자 훈장 2등급 (폴란드) | |
니샨 이프티하르 훈장 (튀니지) |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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